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영정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시조.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지금까지 사료와 문헌에서 밝혀진 것을 보면 삼국사기 제 46 권 열전에는 ꡐ자(字) 고운 혹은 해운ꡑ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그의 자(字)는 해부(海夫) 라고 하고 호(號)는 고운(孤雲)이라고 한다
그는 869년(경문왕 9년)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그리고 879년(신라 헌강왕 5년)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邊)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
중국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881년(신라 헌강왕 7년) 최치원은 그 토벌총사령관인 고변(高邊)의 휘하에 종군하였는데,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뛰어난 명문이었다 한다.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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