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약용(丁若鏞)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저자 정약용 선생은 영조 38년인 1762년 6월 16일 광주(廣州) 초부면(草埠面) 마현리(馬峴里)에서 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丁載遠)과 어머니 파평윤씨 (坡平尹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28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36세 때는 곡산부사(谷山府使)를 지냈는데, 이때의 경험이 이《牧民心書》를 저술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년 후 다시 내직으로 옮겨 형조 참의 등을 역임했으나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자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이후 18년 동안 그곳에서 경학을 연구하는 한편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이 《牧民心書》도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유배에서 풀린 후에는 다시 벼슬하지 않고 향리에서 저술에 전념하다가 헌종(憲宗) 2년, 75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직접 백성들을 대하며 행정을 하는 수령의 역할은 중앙의 어떤 관직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정약용 선생은 수령 노릇을 하는 자에게는 여러 자질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牧民心書》에서 지침하고 있다. 《牧民心書》는 당시 국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등 많은 법전과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여러 책에서 수령들이 본받아야 할 사항을 추려서 모두 12편(篇)으로 삼고, 각 편을 다시 6조(條)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구성되어 있다. 또 각조를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었다.
`청렴은 목민관 본연의 의무이며 온갖 선정(善政)의 근원이 되고 모든 덕행의 뿌리가 된다. 청렴하지 않으면서 참된 목민관이 된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牧民心書》의 두 번째 장인 율기육조(律己六條)에서 공직자가 지녀야 할 청심(淸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그럼 `율기육조(律己六條)`에 제시된 목민관의 행동가짐에 대해 알아보자.
2.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제 2 율기육조(律己六條)
1) 제 1조 몸가짐을 단정히 함{飭躬(칙궁)}
:…(생략)
2) 제 2조 마음을 깨끗이 함{청심(淸心)}
3) 제 3조 집안을 다스림{제가(齊家)}
4) 제 4조 손님을 사절함{병객(屛客)}
다. <解說> 요즈음 사람들이 혹 중문(重門)을 활짝 열어놓는 것을 덕(德)으로 여기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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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야)니 欲治其邑者 (욕치기읍자)는 先濟其家(선제기가)니라. ⇒<解釋> 자신을 수양한 뒤에 집안을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린 뒤에 나라를 다스림은 천하의 공통된 원칙이다. 고을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제 집부터 잘 다스려야 한다. <解說> 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제 집을 다스리지 못하고 어떻게 한 고을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몇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는 데리고 가는 사람의 숫자를 규정대로 해야 하고, 둘째는 꾸리는 집이 검소해야 하고, 셋째는 음식은 절약해야 하고, 넷째는 규문(閨門)이 근엄해야 하고, 다섯째는 청탁을 끊어 버려야 하고, 여섯째는 물건 사들이는 것이 청렴해야 한다. 이 여섯 가지에 법을 세우지 못하면 수령으로서의 정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4) 제 4조 손님을 사절함{병객(屛客)}
: 禁(혼금)은 不得不嚴(부득불엄)이니라. ⇒<解釋> 문단속을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
다. <解說> 요즈음 사람들이 혹 중문(重門)을 활짝 열어놓는 것을 덕(德)으로 여기기만,
이것이 덕이기는 하되 정사를 할 줄은 모르는 것이다. 내 직책은 목민하는 것이지 손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니 생전에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어찌 다 만나줄 수 있겠는가?
문지기와 이렇게 약속하면 실수가 없을 것이다. `무릇 손이 문 밖에 이르면 먼저 따뜻
한 말로 사절하고, 곧 가만히 보고하여 처분을 듣도록 하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사사로 관부를 출입하는 자는 곤장 1백대를 치는데, 아버지·
아들·사위·형·아우만은 이 규정에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