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여의 정치제도
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부족연맹체적 성격을 지녔다. 왕은 일정한 가계(家系)에서 나왔을 것이나 선임(選任)의 유제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족장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왕은 주술적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 성격도 띠고 있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그해의 농사에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하였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영해 준다. 그 뒤 점차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 갔다. 3세기 전반 부여의 왕위는 간위거(簡位居)-마여(麻余)-의려(衣慮)로 이어지는 부자계승이 행해졌으나 그 당시 부자상속의 관행이 족장층 내에서 정립되지 못하였고, 친족집단의 분화도 충분하지 못하여 공동체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 중앙에는 왕 아래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견사(犬使)·견사자(犬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는데, 중앙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가(加)들이 각기 부족을 통솔하였다. 왕은 가들의 대표였으나, 초월적 존재는 되지 못하였으므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남으로부터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 유목민의 압박을 받았다. 이 양대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을 꾀하였으며, 중국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막고, 이들을 제압하는 데 부여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3. 부여의 사회환경
부여사회의 지배층을 이루는 호민층(豪民層)에는 족장들과 종교적 기능을 행하던 샤먼과 같은 이들,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와 같은 기술자, 그 밖의 부유하고 유력한 민호가 속하였다. 그 아래 촌락에 일반민호들이 있었는데 전시에는 족장의 지휘 아래 병사로 출전하였다. 일반민 아래에는 노예가 있었다. 족장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그들에게 부가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족장층과 호민들은 많은 노예를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장례 때 백 수십 명을 순장(殉葬)하기도…(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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