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溪 金長生의 禮說
1. 서 론
일반적으로 사계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예학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예학 뿐만 아니라 성리학에 대하여도 많은 연구를 하였으며 이것은 그의 예학의 이론적 기초가 되고 있다. 사계는 시기적으로 退栗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 전기유학을 후기유학으로 매개시키는 교량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율곡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유학의 근본이념이 修身을 통한 內聖과 平天下를 통한 外王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성리학은 내성을 하는 것이고 예학은 외왕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학의 체계에서 內聖과 外王은 상호 표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계 예학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그의 성리학적 체계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성리학은 자연은 理氣로 인간은 心性情으로 설명을 하여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밝혀 자연과 인간을 합일시키는 이론이며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삶에 적용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예학이다. 특히 조선조 유학은 자연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문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退栗에 의하여 四七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인 예학이 현실적으로 요청되게 되었다.
2. 시대적 배경
沙溪 金長生이 살았던 16세기 중엽으로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백년은 국내외로 다난했던 시기이었다. 안으로는 반세기(1498 ~ 1545)에 걸친 士禍가 지니자 당쟁이 시작되고, 동서의 분당과 남북의 분파가 대립하며 광해의 폭정과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등을 겪었으며, 밖으로는 임진왜란(1592)을 비롯하여 정유재란(1597) 정묘호란(1627)등 남과 북으로부터의 외침이 쉴 사이 없이 계속되던 시기이었다. 율곡은 16세기 후반의 상황을 「국세의 미진함이 지극하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라가 무너지는 환란을 당하…(생략)
3. 사계의 생애와 학문경향
1) 사계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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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 ~ 1599)에게 四書와 近思錄을 배우고 장성하여서는 율곡에게 사사하였다. 19세에 첨지중추부사 조대건의 딸과 결혼하여 이듬 해에 장자 隱을 낳고 27세에 둘째 아들인 愼獨齋 金集을 낳았다.
선조 11년 31세에 昌陵參奉으로 천거된 이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35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이듬해에 喪禮備要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사계의 최초의 禮書이다. 이후 정산현감, 호조정랑, 군자감첨정, 남양부사, 종친부전부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관직생활 중에서도 51세에는 近思錄釋疑를 지었고, 스승 구봉의 상을 당하고 家禮輯覽을 완성한 것 등은 그가 예와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608년 선조가 승하를 하자 광해조에 잠시 관직에 있다가 계축옥사에 심문을 받고 무혐의로 누명을 벗은 뒤로 관직을 사퇴하고 연산에 은퇴하여 학문연구에 전심을 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여러 지우들과 편지를 통하여 학문을 토론하고, 71세에는 경서변의를 지었다. 經書辯疑는 경서를 공부하는 동안 경학연구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기록하여 놓은 것이 쌓여서 책이 된 것이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사헌부 장령이 된 사계는 인조가 私親인 정원군의 제사에 참석을 하여 제사의 축문에 칭호를 考로 하고 子로 하기로 조정의 의견이 결정이 되자 이것을 옳지 않다고 하고 말하기를
제왕의 王統은 비록 형이 아우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숙부가 조카의 왕위을 계승하였다 하여도 모두 부자의 도가 있습니다. ......전하가 이미 선조의 왕위를 계승하고 私親에게 考라 하는 것은 정통을 하나로 하지 않고 근본이 둘이 되는 문제가 있으니 예를 어지럽히는 것이 심하지 않습니까 ......마땅히 程子의 말을 따라서 숙부라 하고 조카라고 하는 것이 근거도 있고 의심할 것도 없을듯 합니다.3)
라고 하여 정통을 바로 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역설하였다. 이듬해에는 고향에 돌아가서 萬言疏를 올렸다. 요약하면 「大本을 세워 舊業을 넓히고, 洪範을 따르며, 小學을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