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메이지 유신(명치유신, 일본어: 明治維新 메이지 이신, 1868년 10월 23일 ~ 1889년)은 일본에서 에도 막부의 체제에서 일본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의 전환과, 전쟁(보신 전쟁),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의 개혁을 말한다. 일본의 정치, 사회 구조를 크게 바꾼 일련의 사건들이다. 메이지 정부(明治政府), 신정부(新政府), 유신정부(維新政府)등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미 해군의 제독 매슈 페리가 이끌고 온 흑선(일본어: 黑船 구로후네)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선진자본주의 열강이 제국주의로 이행하기 전야인 19세기 중반의 시점에서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과정으로 그 시기는 대체로 1853년에서 1877년 전후로 잡고 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때 유신의 싹이 텄고,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幕府)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을 겪었다. 그러다가 300여 년 내려오던 막부가 1866년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官主導)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여 새 시대를 열었다.
이 유신으로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굴종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여러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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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의 붕괴로, 중앙집권국가의 확립을 서둘러야 했던 신정부는, 율령제를 본보기로 한 명칭을 부활시켰다(예:태정관(太政官), 대장성(大省) 등.다만, 실제 율령제와는 다르다).
왕정 복고의 대호령으로 인해, 막부나 섭정, 간파쿠의 폐지와 일본 천황의 친정이 결정되어, 일본 천황 아래로 총재(裁), 의정(議定), 산요()로 나뉘게 되는 관제가 시행되었지만, 메이지 천황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것을 보좌하는 체제가 필요했다. 거기서, 메이지 원년 4월 21일, 정체서(政書)가 공포되었고(정체서 체제), 다음 해 율령제의 2관 8성을 본뜬 2관 6성제가 발족한다. 구체적인 행정 기구로써는, 태정관(太政官)과 신기관(神祇官)을 두어, 태정관 아래에 각 성(省)을 두는 율령제가 모사되었지만, 그 후 민부성에서 공부성으로 분리되거나, 형부성으로부터 사법성으로의 개편 등 무수한 개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도가 안정되지 않았다. 또한 입법부인 좌원(左院, 후 원로원(元老院)), 우원이나 지방관 회의등도 설치, 폐지가 반복되었다. 메이지 중앙의 개혁은 1885년 내각 제도의 발족으로 간신히 안정된다.
또한, 입법부에 관해서 기도 다카요시등이 메이지 초부터 의회개설을 주장하였지만, 의회제도를 발족시키기 위해선, 관제 개혁, 민도(民度), 국민 교육등의 부분에서 미성숙하여 시기 상조였기 때문에,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유사 전제(有司制)[3]`라고 불리는 사쓰마, 조슈 번의 파벌에 의한 관료를 중심으로 한 개혁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의 고조나, 여러 제도의 정비에 의한 개혁 성숙등도 있어, 1881년에 《국회 개설 조서》가 나와, 동시에 이토 히로부미등에 의해 의회 제도를 전제로 한 헌법제정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헌법 심의를 위한 추밀원이 설치되었다. 1889년 일본 제국 헌법 공포, 다음 해 제국 의회가 발족하여,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입헌 군주제의회제 민주주의 국가가 완성되었다.
수도에 대해선, 당초 교토에서는 구폐(舊弊)가 많다고 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