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출신 인물
이용익 [李容翊, 1854~1907]
한말의 정치가이며 본관은 전주, 자는 공필, 호는 석현이며 그 아버지는 고산현감을 지냈다.
대한제국 시기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왕실재정을 확충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는 등 왕실 위주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중심인물이다.
집안은 무과출신으로 양반신분에 속했지만 중앙정계의 문신관료에 비하면 낮은 계열의 집안이었다.
5~14세에는 서당에서 공부했고 20세까지 주자학자인 초병덕 (楚秉悳)에게 사사했다. 이후 고향을 떠나 보부상물장수로 전전하다 금광에 투자하여 부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민비(閔妃)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민영익(閔泳翊)과의 사이에 비밀연락을 담당하여 그 공로로 감역(監役)을 제수 받아 단천부사(端川府使)로 특진하였다.. 기록상으로 그는 달리기가 매우 빨라 장호원과 서울사이를 하루만에 왕복했다고 전한다. 1883년 단천부사, 1885년 북청부사, 1887년 영흥부사에 이어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이때 단천 및 영흥에서 사금을 채굴해 이를 고종에게 바쳐 크게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1888년 불법적인 수탈로 인해 북청민란이 일어나자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서 파면되고 전남 신안군의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함경남도병마사강계부사로 임명되었으며, 1894년까지 다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896년 평안북도관찰사 재임 시 민란이 일어나 다시 유배되었다.
초기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으나 광산 경영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1887년 광무국(鑛務局)이 설치된 이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을 관리했다. 1890년 서북광무감리, 1896년 서북 제부 금광 사무 감독 (西北諸府金鑛事務監督)을 거쳐 1897년 각부각군금은동철매탄각광사무(各府各郡金銀銅鐵媒炭各鑛事務)에 임명되어 전국 광산을 감독하기에 이르렀고, 1898년에는 궁내부 소속 광산 감독 사무가 되어 왕실 소속의 광산을 관장했다. 189…(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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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국외중립을 주장하며 독립을 유지하려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은 그가 조선의 식민지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압송, 10개월간 감금했다. 1905년 귀국하면서 600여 권의 서적을 사들여 와 번역하게 했으며 신교육에 의한 인재양성을 위해 보성학원(현 고려대학교){보성 소학교(普成小學校)를 비롯하여 보성중학교 및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보성고등학교).} 이후 경상북도관찰사제실 회계 심사국장, 군부 대신 등에 임명되어 중앙정계에 복귀했으나 일본의 공작에 의해 다시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비밀리에 출국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세계열강에 널리 알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프랑스로 향하던 중 6월 중국 산둥 성[山東省]에서 일본관헌에게 발각되었고 조선정부는 그의 공직을 파면해 버렸다. 그 뒤 프랑스와 러시아 등지를 유랑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나 1907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기 직전 갑자기 죽었다.
그가 추진한 역둔토 조사와 지주경영은 농민들의 항조운동을 불러 일으켰으며 왕실재정의 일방적인 확대는 국가재정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았으며 집권관료층 내부에서도 그의 탐학과 횡포에 대한 성토가 계속되었다. 비록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화 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으나 그는 왕권강화를 기초로 하여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 등 열강의 보장 하에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노선을 갖고 있던 지사(志士)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필자는 이름만 알고 있던 인물이었지만 이 인물에 대한 생각이 좀 달랐었다.
갑신정변 당시 민비를 보호했던 이 인물은 그저 보수 세력 이고 민비옹호파로만 인식을 해왔었는데 과제 주제로 삼아 조사를 해보니 수면으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인 독립투사였으며 이준열사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