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병자호란
목 차
인 조 반 정
이 괄 의 난
정 묘 호 란
병 자 호 란
북 벌 정 책
삼전도의 굴욕
항 복 조 건
정묘호란의 후유증
분석 및 각오
인조반정 (仁祖反正 광해군 15년 1623)
인조반정
1) 서인의 거사
광해군에 의해 사사당한 능창군의 형 능양군과 명과 후금의 외교론에서 대북파(중립외교 노선)와 철저하게 대립되던 서인(대명사대주의 노선)들은 살제폐모사건을 구실로 이귀, 김유, 이괄, 김자점등이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하고 왕의 조카 능양군을 세웠으니 이것을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2) 서인의 득세와 대북, 소북의 몰락
서인이 득세하여 대북의 이이첨, 정인홍등이 극형에 처해져전멸하고 소북파의 영수들도 처형됐다.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에 유배중이던 남인이원익이 등용되어 남인은 서인 다음가는 세력으로 등장했다.
3) 대외적으로 친명정책을 하여 향명배금책(向明排金策)을 써서 광해군이 유지해오던 중립외교의 틀은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이괄의 난 (인조 2년 1624)
이괄의 난
인조반정에 공이 컷으나 이등공신이 되어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있던차 평안감사로
외직으로 나가게 되어 부병을 이끌고 서울을 공격하니 왕은 공주로 피난가고 도원사 장만, 정충신등 과 싸워 안현(지금의 서대문밖)에서 패하고 뒤에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남아있는 북인세력을 제거하기위해 서인이 음모를 하였다는 의도가 보이는 사건임.
큰내란으로 일부는 후금으로 달아나 인조즉위의 부당함을 호소하여 후금의 조선 침공을 재촉했다.
쌍수정 사적비
정묘호란(丁卯胡亂 인조 5년 1627)
정묘호란
1) 내침목적-명을 치기위한 준비로 가도(단도)의 모문룡를 잡아 들일 것과 명나라 토벌에 조선군사 3만을 지원하며, 조선의 만주영토를 후금에 내놓을것을 요구하며선제 공격하여 명나라를 친 후에 발생 할 수 있는 문제를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2) 인조 5년에 후금의 태종은 왕자 아민(阿敏)으로 하여 3만…(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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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를 맺고 송파강안(松坡江岸)에 서있는 삼전도비는 청태종의 송덕비로 치욕적인 기념물이다. 이로서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되고 이것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할때 까지 계속되었다.
삼전도비
항복 조건
항복 조건
① 출성 항복과 동시에 명나라로부터 수여된 고명(誥命) 책인 (冊印)을 청국 황제에게 바칠 것.
②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청국과 군신 관계를 맺을 것.
③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청국 연호를 사용할 것.
④ 세자와 왕자 및 대신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⑤ 청이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병을 파견할 것.
⑥ 청이 가도를 공략할 때 원병을 파견할 것.
⑦ 매년 정기적으로 정조사(正朝使) 동지사(冬至使) 천추사(千秋使) 및 각종 경조사절(慶弔使節)을 파견할 것.
⑧ 포로가 도망하여 환국할 경우, 이를 즉각 심양에 반송할 것.
⑨ 조 청 양국 신하들의 통혼(通婚)을 장려하여 화호(和好)를 돈독히 할 것.
⑩ 성지(城池)를 개축하거나 신축하지 말 것.
⑪ 매년 일정한 품목 수량의 세폐(歲幣)를 보낼 것.
정묘호란*병자호란 청의 진격로
당시 사용된 무기 와 갑옷 및 도구
당시 청나라 군인의 모습
분석 및 각오
분석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칼과 조총으로 근접전(단병전술)을 벌이는 왜군에 대한 대응 방법을 강구하여 포수(총), 사수(활), 살수(창, 칼)로 구성된 삼수병체제를 개발하였다. 이 삼수병체제는 북방의 여진과 싸우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청군은 조선의 산성을 무시하고 빠른 기동력을 이용, 대로를 따라 한성으로 밀고 내려왔다. 이에 조선군의 지휘체계는 마비되었고 청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산성중심의 방어 전략을 무력하게 만든 주원인은 ‘청야작전’(군량과 무기를 모두 산성으로 옮기고 미처 옮기지 못한 것들은 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의 실패에 있었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는 막대한 관곡과 병기가 후금군 손에 들어갔다. 따라서 후금군의 진영에는 군량이 남아돌 지경이어서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