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同床異夢)에서 깨어났을 때
- 조광조(趙光祖)와 중종(中宗) -
목 차
Ⅰ. 서론
Ⅱ. 중종, 왕권을 꿈꾸다.
1. 연산군 이복동생, 진성대군 왕위에 오르다.
2. 중종, 삼사에 눈을 돌리다.
Ⅲ. 조광조, 성리학 이상을 꿈꾸다.
1. 조광조, 그는 누구인가
2. 조광조의 개혁정치
Ⅳ. 조광조는 누구 또 왜 죽었는가
Ⅴ. 결론
Ⅰ. 서 론
‘역사(歷史)란 무엇인가’라는 당혹스런 질문은 수많은 석학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역사=무엇’으로 단정적으로 정의하지 못한다. 그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주체와 기록되는 대상이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한 가지 말로 정의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면, 역사를 비롯해 인간을 다루는 학문인 인문학은 골치 아픈 대상이 아닌, 명쾌한 설명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옛 속담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복잡성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 인간의 기록인 ‘역사’ 역시 100%의 진실만을 이야기 한다고 보기 어렵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그리고 중국의 사서까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 다른 시각적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료 비판이 존재하는 것이며, 연구자는 수많은 자료를 비교 분석하며 보다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에는 기록되는 사실과 실제의 사실과는 격차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발표에서 다룰 중종과 조광조도 마찬가지다. 보통 중종을 훈구세력에 눌린 소심한 왕으로 기억하고, 조광조는 훈구세력에 밀려 숙청당한 비운의 개혁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과연 이 두 인물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와 같은 인물일까 이 발표에서는 중종, 그리고 조광조는 누구이며, 그 두 명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한다.
Ⅱ. 중종, 왕권을 꿈꾸다.
1. 연산군(燕山君)의 이복동생, 진성대군(晉城大…(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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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 세력은 최대화 하는 것’에 있었다. 이리하며 상당수의 ‘잠재적 청산 대상’들이 면죄부를 받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반정의 결과 총 117명이나 되는 전례 없는 대규모의 공신집단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인척관계로 연결되어 과거의 공신세력보다 결속력이 더 강하였다. 또한 대신들을 감시하고 감찰해야 할 삼사는 연산군 대 사화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에 중종 초기에는 반정공신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선 정국 3등 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오른 송질(宋)조차도 공훈이 있는 사람은 박원종 등 10여 명뿐이라고 인정한 사례가 있다.
“만약 공이 있는 사람만을 기록한다면 박원종(朴元宗) 등 10여 인에 불과하나, 대사(大事)는 온 조정이 모두 하는 것이므로 육경(六卿)이 모두 참여되었습니다. 혹 미소(迷少)한 자제(子弟)를 아울러 기록한 것은, 아마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부자 형제가 그 화(禍)를 같이하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그 공신을 의논하여서는 안 됩니다.”
물론 송질의 의도가 어떠했던 간에 위의 기록은 당시 반정공신들도 그 공의 허의성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기득권 세력은 불법과 비리를 동원하여 권익 확대에만 골몰하였으며 노비가 3천명에 이르고 토지는 국토의 절반을 차지했다. 공신의 적장자는 젖먹이라도 녹봉을 받아 왕자군보다 더 좋은 책봉을 누렸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부패하였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사간 이희맹(李希孟)과 지평 신상(申)이 앞의 일을 논계하였다. 신상이 또 아뢰기를, “근래에 묵은 폐단을 이미 다 혁파하여 제거하였으나, 군사와 식량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지금 국가의 군액(軍額)이 감모(減耗)되어, 조례(隷)나장(羅將)도 또한 그 수를 충당하지 못하는데, 재상(宰相)들이 그 정수 이외의 반인(伴人)1864) 을 남점(濫占)하는 폐단이 이미 오래되었으며, 당하관도 세력이 있는 자는 또한 남점이 많고, 수령(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