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
1. 인쇄란 무엇인가
인쇄는 인쇄판의 판 면에 먹 또는 잉크를 묻혀 그 판 면의 문자?기호?그림 등을 종이?비단 등에 누르거나 문질러 찍어내는 일, 또는 그 기술을 말한다. 인쇄판은 옛적의 목판?활자판을 비롯하여 근대의 평판?볼록판?오목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우리 나라의 초기 인쇄는 목판인쇄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기는 경주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목판권자본이 751년 (경덕왕 10) 무렵에 간행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초기의 목판인 쇄는 본문 내용이 짤막한《다라니경》등의 불경을 소형판에 새겨 다량 찍어 납탑공양(納塔供養)한 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목판인쇄는 꾸준히 발달했으며 그 유물로 1007년에 인쇄된《보협인다라니경 寶 印陀羅尼經》등이 보존되어 있다. 한편, 목판인쇄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뿐만 아니라 오직 한 책의 출판으로 국한되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에, 출판공정 의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필요한 책을 간편하게 찍어내어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활자인쇄가 시도되었다. 그 최초의 것은 11세기 중기에 북송(北宋)의 필승(畢昇)이 고안한 교니활자(膠泥活字)의 인쇄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료가 흙이고 조판이 어려워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그 실패를 금속활자의 인쇄에서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 바로 고려의 주자인쇄이 다. 13세기 전기에 주자로《상정예문 詳定禮文》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중 주자본을 다시 새겨낸《남명천화상송증도가 南明泉和頌證道歌》가 전하여지고 있다. 고려의 주자인쇄는 조선조로 계승되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활자의 재료면에서 볼 때 동?연?철?나무?찰흙 등과 같이 그 종류가 다양하며, 글자체의 면에서 볼 때는 더욱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론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인쇄술을 주로 다루어 설명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나라 인쇄의 기원…(생략)
(1) 사경(寫經)의 활용
(2) 금석문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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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번성에 따라 늘어나는 불경의 수요를 일일이 베껴 쓰는 사서로는 충족시킬 수 없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보다 간편한 방법으로 특정의 다라니경을 다량으로 찍어내기 위한 기술, 즉 인쇄술의 출현을 자극하게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된다.
(2) 금석문의 출현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세계의 각지에서는 다양한 기록 방식이 있었음을 앞에서 살펴 본 바 있는데, 우리 민족도 인쇄술의 발상(發祥)에 앞서 이미 다양한 방식을 통해 기록을 남겼으며, 이들 방식들이 발전하여 인쇄술 출현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금석류(金石類) 등의 표면에 문자나 그림을 새기고 이를 탁인(拓印)해 내는 방법인데, 이는 보다 발전하여 목판에 글자의 획을 반대로 새겨서 대량으로 인쇄해 내는 방법과 기술을 낳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석각비(石刻碑)로는 기원전 85년경으로 추정되는 평남 용강군의 점제현 신사비가 있다. 그 뒤 414년에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에 광개토왕비가 세워졌으며, 신라 진흥왕 때에는 4개의 순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또한, 경북 영일에서 발견된 석비는 개인의 재산 소유 현황과 사후의 재산 상속을 확인해 주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눌지왕 27년(443)의 것으로 추정되어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석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각뿐만 아니라 금속으로 된 기물에도 문자가 새겨지거나 주성(鑄成) 되었다. 경주에서 출토된 청동 함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위업을 기리는 명문(銘文)이 양주(陽鑄)되어 있는데, 이러한 주조를 위해서는 글자를 새긴 주형(鑄型)을 만들어야 했음을 감안한다면, 그 당시 벌써 이러한 기술이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때 고분 축조용으로 만든 벽돌에도 문자가 음각되어 있고, 경남 의령에서 출토된 6세기경의 금동여래입상에도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목판인쇄술이 시작되기 이전의 것들이다. 이러한 기술은 석판에 장문의 불경을 정각(精刻)하는 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