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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15~16세기)
철화백자(17세기)
청화백자와 철화백자의 문양 비교
역사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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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란?
백토로 기형(器形)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해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花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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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지
청화백자는 경기 광주군을 중심으로 번조되었는데, 이 일대의 수많은 관요(官窯) 터가 그것을 말해준다. 광주 관요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거듭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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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입과 발전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10년) 명나라에서 전해진 것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년) 중국에서 회청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따르면 1465년(세조 11년)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옹원 소속 사기장 380명이 사기를 제작하였고 명대 청화를 모방하였다 한다.
1469년(예종 1년)에는 전남 강진 산(産) 토청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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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입과 발전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 무렵에는 이미 중국양식에서 탈피하여 조선적 특색이 양식적으로 정착된다. 그러나 16세기…(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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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라고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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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입과 발전
조선중기에는 임란과 호란으로 인하여 사회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도자 문화에도 변화를 보이며 코발트의 구입이 어려워짐에 따라 청화백자의 제작이 줄어들고 철화백자의 생산이 관요를 중심으로 지방가마에서도 이루어져 17세기의 특징인 철화백자의 세계를 이루었다.
영조 29년(1754년)에 법령으로 암청색은 사용을 규제했기 때문에 철사가 코발트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이 법령은 순조 3년(1803년)까지 실시되었으며 그 후 19세기부터는 코발트의 구입이 수월해지면서 법령이 풀리게 되고 철화백자의 제작은 보이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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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입과 발전
고급궁중용품을 구워내던 광주 분원사기(관요)일 경우 백자의 질도 좋고 그림도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예가 많다.
그러나 시골에 있는 일반 민요가 생산한 철화 자기들은 그릇모양이나 백자의 색깔모양도 수수할뿐더러 그림은 대개 도공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도식화된 그림들이 아무 욕심 없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
청화백자는 고귀한 수입 회청을 원료로 써야하므로 구입이 어려웠던 관계로 그 대용품으로 발달된 것이 “철화백자”
따라서 철화백자는 청화안료를 쓸 수 없었던 지방 민간 가마에 편재해 있었던 것이고 그림에 각기 지방특색을 나타나며 단조로운 듯해도 매우 변화 있고 다양한 양식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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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
발굴된 기종으로는 갑번과 상번, 개별식에는 발, 접시, 원호, 입호, 벼루, 뚜껑, 돈채기 접시, 편병, 명기, 병, 판형이가 부착된 향로, 전접시, 잔, 화형잔, 합, 묘지 등이 있다
청화백자에 비해 일상 생활기명 역시 많이 제작, 사용되었음
=철화백자는 관과 민의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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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
철화백자는 명 청화백자를 그대로 모방한 초기의 문양은 보이지 않으며 조선 초기에 백자가 조선적인 양식을 갖추었을 때 청화안료와 함께 혹은 철화 단독으로 시문되기 시작했으나, 조선 중기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