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세기 청화백자와 철화백자에 나타난
회화성, 역사성 연구
목차
1. 역사적 배경
1.1 청화백자의 유입과 조선 전기 상황
1.2 17세기 조선의 상황과 철화백자의 발전
2. 청화백자
2.1 출토지
2.2 유입과 발전
2.3 기형
2.4 문양
3. 철화백자
3.1 출토지
3.2 유입과 발전
3.3 기형
3.4 문양
4. 청화백자와 철화백자 문양 비교
4.1 청화백자와 철화백자의 차이점
4.2 대표 문양 비교
4.3 각 시대의 문양과 회화의 상관관계
5. 결론
참고자료
참고문헌
1. 역사적 배경
청화백자와 철화백자를 연구하기에 앞서 백자 발달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고자 한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는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 유입이 되었으며 어떻게 자체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는지, 청화백자에서 철화백자로 왜 그 흐름이 이동하였는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1.1 청화백자의 유입과 조선 전기 상황
조선 청화백자는 중국 원?명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던 중국 청화백자가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명 왕조와 사대조공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명 황실로부터 다수의 청화백자들을 공식적으로 건네받았다. 이렇게 전래되어온 청화백자는 조선왕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식적인 유입 외에도 우리나라 사신들의 중국 왕래 과정에서 무역을 통해 비공식적인 청화백자 유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외부로부터 새로이 청화백자가 유입되며 우리 도자에 자극제의 역할을 하는 한편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였을 것인데, 당시 사용되던 청화백자는 중국을 통해서만 한정적으로 공급되었다. 이 때문에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 및 유입상황의 변화는 조선에서 청화백자의 사용 및 제작과 큰 상관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선 청화…(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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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당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체적인 청화백자의 제작 필요성을 제기하게 하였을 것이며, 그에 따라 왕실의 주도 하에 청화백자의 생산을 위한 노력과 시도에 의해 마침내 세조 연간(1455-1468)에 자체적인 조선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중국 내에서 청화백자의 생산이 다시 활발해지게 된 성화 연간(1465-1487) 이후에도 공식적인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점이 주목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세조 연간에 수입 회청 및 토청을 이용하여 국내산 청화백자의 제작이 성공하였고, 더욱이 1470년을 전후하여 경기도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관요가 설치된 이후에는 청화백자의 제작이 본격화되면서 안정적인 공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선왕실의 입장에서 중국을 통한 전래의 필요성이 이전보다는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러한 조선 내부의 사정이 조선에 자주 내왕했던 조선출신의 명사들을 통해 명 황실에 전해짐으로써 더 이상 공식적인 청화백자의 전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5세기 말, 1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나라 안이 안정됨에 따라 문화 역시 최고조로 발달하는데, 조선 전기 즉 태종 때부터 성종 연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새로운 개혁을 일으켜 활기에 넘쳤으며 특히 세종, 세조, 성종연간에는 문화적 측면에서 전성기를 이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조선 초기의 모습은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국가를 운영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도와 왕조의 문화 창조의 힘을 갖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도자 역시 마찬가지로 함께 발전하였는데 조선 사대부의 유교사상으로 말미암아 국교도 유교로 변하고 유교의 가르침이 검소, 소박한 생활이었기 때문에 조선조 도자기는 정갈하고 담백한 분위기를 띠며 발전한다.
1.2 17세기 조선의 상황과 철화백자 발전
16세기 전반은 연산군에서 중종간의 시기로 조선 초기의 안정된 사회에서 정치 경제 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해, 붕당 세력의 정치적 부패, 사림세력의 등장, 그리고 그들의 이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