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 마지막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 인물소개 및 가계, 정권장악 전개분석, 천리장성 분석, 역사전개 조사분석 )
목 차
1. 머리말
2. 본문
1). 가계
2). 연개소문의 정권장악
3). 나라 지키는 연개소문
4). 천리장성
3. 맺음말
1. 머리말
연개소문은 7세기 중반 고구려 최고의 실력자로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이끌었던 역사 인물이지만 기록에서 그의 행적은 지극히 불완전하다.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이 전적으로 전쟁 적국이었던 唐과 唐을 계승한 宋의 집권층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그 기록에서 연개소문의 삶은 대부분 결락되었고, 선택된 부분 역시 자국사 기술의 관점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연개소문은 비정형적인 모습으로 불규칙하게 나타나는데, 이로 인해 우리의 연개소문 이해는 수시로 혼란에 빠진다. 이는 연개소문 관련 정보들이 이야기의 형성과 전승의 경로를 배제한 채 유통되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흔히 성정이 잔인, 포악하면서도 신출귀몰한 인물로 묘사되고, 정변을 통해 임금(영류왕)과 중신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보장왕)을 세운 독재자로 표현되고 있다. 반면 긴박한 대외 관계 속에서 고구려의 위상을 떨친 인물이기도 하다. 연개소문이 국권을 한 손에 쥐고 그 위세를 내외를 떨친 642년에서 666년 사이의 시대는 서쪽으로는 당태종 이세민이 침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남으로는 신라가 김춘추, 김유신 등의 활동으로 나당 양국의 관계가 점차 접근하여 갔을 뿐 아니라 고구려 내부적으로는 2,3차에 걸쳐 대규모적인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복잡한 정세를 띄고 있었다. 이러한 절박한 시기에 영걸 연개소문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연개소문이 어떠한 과정으로 고구려의 정권을 장악하였고, 당시 국제적으로 고구려가 어떠한 처지였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 본문
1). 가계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며, 죽은…(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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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인다. 무려 180여명을 없애 버리고, 곧바로 왕궁으로 들어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운다.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한 그는 왕의 조카인 보장을 새로운 왕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한 손에 쥐게 된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 간에 타협으로 일단락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던 것 같다. 이 안시성주와의 협상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연립정권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하였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의 직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귀족들이 호선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임하였는데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여의치 않으면 각기 사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결정지었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을 가지지 못하여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그러한 정변은 때로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어갔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 보이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 등은 그러한 한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그 지위가 아들에게로 세습됨에서 보듯, 연씨일가를 중심으로 한 보다 강력한 집권화가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집권 후 국내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3). 나라 지키는 연개소문
당시 국제정세는 중국에서는 수나라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으로 수나라가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나마 중국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