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 근대이행기 유교의 역할과 이중변혁 - 막말 변혁운동을 중심으로 )
목 차
Ⅰ. 들어가며
Ⅱ. 막말 변혁운동과 그 특징
Ⅲ. 변혁운동에 있어 유교의 영향
Ⅳ. 변혁의 수단으로서 유교의 역할
Ⅴ. 청말 입헌 개혁론과 유교
Ⅵ. 이중변혁과 유교
Ⅶ. 결론
Ⅰ. 들어가며
일본은 막부 봉건체제가 막을 내리고 명치유신이라는 근대적 개혁의 수순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서른셋의 나이에 막부 순찰대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지만, 젊디젊은 그가 남긴 족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가 죽임을 당한 해가 1867년이었고, 명치유신은 1868년이었으니 모든 것이 참으로 절묘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근대사가 일본 제국주의를 만들어 내고 아시아 전체를 전란에 몰아넣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당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서양제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려 했던 막부 말기의 허다한 재사와 인물의 노력과 세계관의 변화를 비난만 할 일은 아니다. 도리어 이들에 비해 봉건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마침내는 식민지가 되고 만 우리의 역사를 탄식하면서 1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그런 늪에서 확실하게 빠져 나왔는가를 묻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막부 말기와 명치유신의 과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당시 일본의 거대한 격동의 시대와 그런 시대를 통해서 등장한 인물들의 운명이 하나의 웅장한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일본역사의 왜곡과 편견이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이들이 막부 말기와 명치유신 당시의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대단하다. 그걸 기점으로 해서 일본은 세계사에서 전혀 다른 경로를 거치게 됐으며, 아시아에서 선진적인 위상을 지닐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엽, 조만간 서양에 의해 먹히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 막부체제의 모순을 경험했던 당대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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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 경직된 막부의 봉건체제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고 재정 위기와 농민의 저항, 사무라이 계층의 궁핍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1) 대외 문제에 있어서도 서구세력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이른바 해방론(海防論)이 대두되는 등 기존의 쇄국체제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였다.2) 각계각층에서 개혁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막부는 교호(享保)개혁, 간세이(寬政)개혁, 덴포(天保)개혁을 실시하여 체제 안정을 기도하였으나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니 않았다. 한편 지방의 번(藩)이나 중하급 사무라이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어 19세기에 이르면 변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다.
막말 변혁운동은 실로 복잡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 그 구체적 양상을 모두 살필 수는 없다. 그러나 몇 가지 핵심적인 특징 정도는 지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는 막말 변혁운동의 주된 특징으로 다음 3가지를 들고 싶다. 첫째는 이른바 지사(志士)들의 등장이다. 물론 지사는 특정 신분이나 정파를 가리키는 명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렇지만 막말에 이르면 지적 교양과 개혁에 대한 열정, 번을 뛰어넘는 원시적인 국가주의 관념을 공유하는 일련의 사무라이들이 등장했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3) 이러한 지사는 지방 번에 거주하는 젊은 중하층 사무라이 계층을 중심으로 존재했으며, 이들이야말로 막말 변혁운동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실질적인 주역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의론정치(議論政治) 혹은 공론정치(公論政治)의 활성화이다. 에도막부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소수의 노중(老中)을 중심으로 한 담합정치라 할 수 있다.4) 중국이나 조선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언관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정책 결정자의 범위 역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에 들어 정치 참여의 범위가 중하층 사무라이는 물론 상층 농민층까지도 확대되기에 이른다. 막부와 각 번은 대내외적 위기 극복을 위해 각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