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1990년대 대내외적 위기상황
1. 대외적 위기 상황
1990년대의 북한은 엄중한 국내외 정세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존립을 크게 위협받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북한은 세계 사회주의권의 연쇄적인 붕괴로 인한 체제위기와 식량난, 에너지난을 동시에 겪으면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한다.
무엇보다 동서독의 통일, 동구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옛 소련의 해체 등 세계적 수준에서의 냉전의 해소는 북한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특히 소련의 해체는 북한이 초강대국인 미국에 맞서기 위해 필요로 하는 현대무기의 주요 공급원 상실 및 ‘국제혁명역량’의 결정적인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1990년대 초반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 그리고 국제적인 정치, 군사적 압력은 북한의 체제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련의 해체로 인한 러시아로부터의 원조의 중단과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의 감소는 또한 북한의 대외무역을 상당한 정도로 위축시켰고, 그 결과 북한경제는 1990년부터 9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선군정치의 출현은 1990년대 조성된 세계정세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김정일장군의 선군정치>라는 책을 저술한 김철우는 이 책에서 선군정치가 출현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0세기 90년대에 이르러 세계적 범위에서는 정의와 진보의 표대로 되어있던 사회주의권이 약화, 붕괴되고 제국주의, 지배주의 세력이 판을 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탈랭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전략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제창해 나섰고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제국주의 렬강들의 기승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광신적인 것으로 되었다. 약소국가, 약소민족에 대한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지배주의세력의 강경압살, 고립책동은 더욱더 엄혹해 졌으며 그것으로 하여 진보적이고 정의적인 세력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한…(생략)
2. 대내적 위기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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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대내적으로는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에 따른 리더십의 불안정, 경제파탄으로 인한 아사자의 발생과 탈북자 증대 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다. 특히 1995, 1996년 두 해에 걸쳐 발생한 대홍수와 1997년의 가뭄으로 경제난이 극도로 악화되어 북한정권은 역사상 최대의 식량난과 아사자의 발생에 직면하게 되었다. 심지어 식량난이 극심해 이 시기 아이를 죽여 인육을 먹는 참극이 빚어졌다는 탈북자의 증언까지 나왔다. 2006년 5월 탈북자로는 처음 ‘비정치적 망명’이 허용돼 미국에서 살고 있는 신요셉(가명?32세)씨는 동료 탈북자 5명과 함께 7월 19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직접 보고 들은 일’이라며 끔찍한 인육사건을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내가 1996년 직접 보고 들은 일이다. 우리집 옆동네 장마당(시장)에서 순대를 팔던 부부가 있었는데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모들이 식량을 구하러 간 사이 장마당에서 빌어먹는 아이 13명을 죽여 이들의 내장으로 순대를 만들어 팔다가 적발됐다. 13번째 죽은 아이를 발견했을 때 어느 집 아이 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학교 마당에 아이의 잘린 머리를 두고 전교생에게 직접 확인시키기도 했다. 동생 찬미도 이를 목격했다』(연합뉴스, 2006. 7. 19., 동아일보 2006, 7. 20)
북한에서의 인육사건은 그동안 탈북자들의 입을 통해 간단없이 전해져 왔다.
‘두레마을’과 ‘대구빈들교회’ ‘외국인노동자피난처’에 소속된 20-30대 청년들이 중심이 돼 발족한 북한 기아동포 돕기 기독교인 단체인 ‘통일강냉이보내기모임’이 북한의 기근 실태를 파악하기위해 함경북도 회령에서 탈출한 31세의 북한 남자를 1997년 4월 중국에서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994년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월경했다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경험이 있었다. 그때 회령시내에서 내 옷 차림이 너무 좋았던 것이 의심을 받아 안전부 요원에 붙잡혔다. 안전부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던 중 총 개머리 판으로 머리를 심하게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