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宗 이야기
불교의 여러 종파 가운데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어로 삼고 있다. 책 속에 쓰여져 있는 가르침 밖의 새로운 전통이라는 뜻이다. 불성을 보는 것과 부처가 되는 것은 동일하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아마 깨우친다는 것이 요즈음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요즘도 지식이 곧 사람됨을 낳는다라고 얘기하지만, 그때에 앎과 부처가 됨 사이에는 거의 중간 단계가 없이, 무매개적으로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대략 11세기에 이러한 표어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구호 하나 하나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를 파헤쳐 보기로 하자.
혜능의 독설
선종은 초기, 중기, 말기로 나뉘는데, 초기에 이미 중기에 성립되는 표어를 완성시키는 계기가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혜능이 일자무식이라는 말속에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아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발상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문자를 숭상하기는 했으나 깊이 천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표어가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선종 초기의 특징은 이미 ??육조단경??에서 법달(法達) 이라는 독경승(讀經僧)을 호되게 꾸짖고 경전을 올바로 읽는 정신이 무엇이어야 함을 가르치는 혜능의 태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법화경이 너를 돌리지 말고 네가 법화경을 돌려서 읽어라.’ 옛날에는 책이 부족했으므로 따라 읽는 것만으로 기능을 다했던 스님이 있었던 모양인데, 화타(법달)이라는 스님은 법화경을 따라 읽고서도 그 뜻을 몰랐으므로 혜능에게 꾸지람을 들었던 모양이다. 특히 그 정신이 이어져, ‘문자에 구애받지 말거라(不立文字)’라고 했다. ‘不立文字’의 본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겠다.
혜능이 일자무식이라는 것은 본래 문맹이 많던 옛날 중국의 보통 사람들한테 타고난 본성만 제대로 개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격려의 뜻이었…(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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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이다. 여러분들은 아마 그림을 그릴 적에 가끔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이것을 보고 누가 좋아할까? 필자도 책을 쓸 때마다 이것을 읽고 몇 사람이나 이해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不立文字’라는 말은 책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얼마나 중요성을 가지고 잇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해는 그 문자의 축적인 책을 줄줄 읽는다고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그 정보와 지식이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데 필요한 정보를 담은 문자와 그 문자를 담은 책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불경은 읽을수록 이해는 되는 것 같으나 실천을 겸하지 않으면 공중에 뜬 것과 같다. 그리고 아마 이런 식의 미술사나 미술에 관계된 철학적 원리를 듣는 사람들도 직접 그것을 붓에 옮겨서 그림을 그릴 적에 이것이 얼마만큼 피와 살이 되는 것인지, 책과 말속에 들어 있는 진리가 살아 있는 진리로 바뀌는 메커니즘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창조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자 속에 창조의 비밀은 없다. 그러면 문자를 벗어나면 또 무엇을 가지고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문자를 벗어나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不立文字’라는 말은 우리 자신이 창작 활동에 대한 의의를 천착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표어는 선종의 표어로만 생각하지 말고, 문자에 의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말이 마음의 그림자라면, 문자는 말의 그림자이다. 문자라는 그림자를 통해서 마음을 캐서 밝히려니 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아예 말과 글자를 없애 버리면 어떨까? ‘不立文字’를 그렇게 이해하고 말없이 사는 묵언(?言)을 택하고, 책 없이 사는 문맹(文盲)을 택하랴? 그것이 선종의 정신인가? 아니다. 우물쭈물 주저할 것도 없이 그런 뜻은 아닐 것이다.
마음에 가장 가까운 말을 경제적으로 사용해 보자. 쓸데없이 줄줄이 늘어놓은 언변을 담은 그 많은 불경과 논소(論疎) 등 책에 집착하는 교학불교,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느라, 교판의 체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