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외침, 티베트
-중국과 티베트의 대립 상황-
Ⅰ. 들어가며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은 면적의 국토를 소유하고 있는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다. 중국은 1949년에 공산당 정권을 수립하면서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56개의 민족이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라는 이름으로 한 국가를 구성하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서 소수민족을 포함한 모두를 중국인이라 칭하고, 그들을 중화민족이라 일컫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독립되지 못하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복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민족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독립을 허용하게 될 경우 중국 전체의 분열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중국 정부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단 하나의 중국(只有一個中國)’정책을 중국의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또한 ‘단 하나의 중국’ 정책을 와해시키려는 어떠한 대내외적인 시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방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정책 기반 하에 여러 소수민족들의 반발을 없애고자 당근 정책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소수민족 우대정책이다. 이를테면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에 그 크기에 따라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을 지정해주어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해주고 있다. 이들 자치 지역에는 자결권은 없으나, 중국 정부의 정책에 어긋나지 않는 선의 자치는 가능하다. 현재 중국에는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영하회족자치구(回族自治區), 광서장족자치구(壯族自治區), 신강위구르자치구(維吾爾自治區), 서장장족자치구(藏族自治區) 와 같은 다섯 개의 자치구가 있고, 31개 자치주와 80개의 자치현이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중국 정부의 ‘단 하나의 중국’ 정책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제한되므로, 소수민족들에게 만족을 줄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중국 정부는 서서히 소수민족을 한족으로 동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소수민족들의 반발의 여지가 남아 있는 …(생략)
Ⅱ. 티베트족에 대한 이해
다. 심지어 티베트의 문자는 7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들의 고대 정권은 투루판(토번)이라고 하는데, 일찍이 641년, 투루판의 왕 송찬간포(松贊干布)가 당(唐)의 수도인 장안(長安)에 사신을 보내어 구혼을 하여 총명하고 아름다운 문성공주(文成公主)를 아내로 맞이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이러한 일화를 통해 우리는 중국과 티베트족이 오래 전부터 교류가 있어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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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자세히 티베트족에 생활상에 대해 알아보자면, 그들의
생김새는 터키인과 유사하고, 유목민족인 만큼 목축업 중심의 반
농반목(半農半牧)의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식생활의 특징으
로는 면을 주식으로 하는 것과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차를 즐겨
마시는 점인데, 특히 버터차와 우유차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굉장히 민족적인 의상을 입으며,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땋고 그 위
에 모자를 쓴다.
한편으로 티베트족에는 ‘哈達’이라는 독특한 의식이 있는데,
哈達은 그들이 특별히 만든 흰색의 긴 비단으로, 귀한 손님을 찾아뵙거나 접대할 때에 두 손으로 희고 깨끗한 哈達을 헌상하여 상대에 대한 예를 표하는 것이다2).
그림 . 티베트 라싸에 위치한 포탈라궁
티베트족은 종교를 굉장히 중시하는데, 그들이 믿는 종교는 라마교이다. 그러므로 티베 트에는 많은 성지, 사원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성지로 꼽히는 곳은 바로 포탈라궁
(그림 1)이라 할 수 있겠다. 포탈라궁은 라싸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 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뽑히기도 한 만큼 그 경관은 대단하다. 이러한 포탈라궁을 보더라도 티베트족은 중국의 다방면에 큰 기여를 한 민 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티베트족을 이 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달라이 라마인데, 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티베트의 종교적, 정치적 통치권자 - 달라이 라마
티베트족이 중국 정부에 대립하여 독립 투쟁을 하는 가운데에는 달라이 라마가 있다. 그는 제정일치 사회인 티베트에서 종교적, 정치적인 통치권을 갖는다. 그는 지금까지도 그들 민족을 대표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림 . 제 14대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라는 어원에는 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