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敎의 基本觀念에 대한 再考察
<目 次>
一. 緖 論 四. ?仁?의 語源
二. ?儒?의 起源 五. ?仁?의 意義
三. ?孝?의 語源 六. 結 論
一. 緖 論
요즈음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儒敎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듯하다. 어떤 이들은 儒敎에 대해서 그 폐해를 논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볼 때 오늘날은 儒敎의 본질적 가치를 이해해서 이를 현대의 문제점 해결에 응용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매우 절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일본?중국을 막론하고 근대 이후에는 서양 제국주의의 군사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儒敎의 폐해에서 찾으려 했던 자아반성적 태도로 말미암아 儒敎를 배척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과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답습하기에 급급하여 다시 儒敎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으며 중국은 極左的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장기간에 걸쳐서 극심하게 儒敎를 비판했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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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南大學校 中語中文學科 敎授
** 이 논문은 1997년도 충남대학교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국 儒敎는 오랜 세월의 문화적 단절과 왜곡에 의해서 침체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일본?중국을 막론하고 儒敎는 표면적으로만 침체되었을 뿐 실제의 생활에서는 대부분 儒敎的인 신념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儒敎儀禮를 실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1) 특히 한국은 동양 3국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儒敎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한국인의 대부분은 儒敎的 동양 문명이 향후 근대 세계의 보편적 사상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2)
儒敎의 폐해를 논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매우 충격적이고 우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儒敎의 본질적 가치를 어느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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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접한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推論될 것이다. 특히 ?儒?의 起源과 관련해서는 ?殷 나라가 멸망한 以後?라는 說에 대해서 異議를 제기하고, ?孝?의 語源과 관련해서는 ?아들이 노인을 받들고 있는 모습?이라는 說에 대해서 異議를 제기하며, ?仁?의 語源과 관련해서는 ?사람이 둘?이라는 說에 대해서 異議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또한 ?仁?의 意義와 관련해서는 儒敎의 ?仁?이 ?差等的인 사랑?이라는 說에 대해서 異議를 제기하는 동시에, 儒敎의 ?仁?은 다름 아닌 ‘博愛’로서 ‘절대적인 사랑임’을 밝힐 수 있는 端緖를 찾아보고자 한다.
二. ?儒?의 起源
?儒?의 起源에 관해서는 대체로 ?殷 나라가 멸망한 以後?라는 說이 주장되어 왔다.3)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胡適은 그의 <說儒>편에서 ?이 遺民의 선비들은 옛 복장에 옛 언행으로 스스로 특수한 계급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긴 도포에 큰 모자의 옹색한 모습인데다가, 또한 모두 예절이 밝아 점잖은 亡國遺民으로서, ‘건드려도 개의치 않는’ 無抵抗主義에 익숙해져, ‘儒’라는 別名을 얻게 되었다. 儒는 軟弱한 사람으로, 소매가 넓은 옷에 큰 띠를 매어 품위깨나 있는 모습을 가리켰을 뿐만 아니라, 亡國遺民으로서 치욕을 참아가며 중차대한 책임을 지는 柔道의 人生觀을 가리킨 것이다.(此種遺民的士, 古服古言, 自成一個特殊階級, 他們那種長袍大帽的酸樣子, 又都是彬彬知禮的亡國遺民, 習慣了??犯而不校??的不抵抗主義, 所以得着了??儒??的渾名. 儒是柔懦之人, 不但指那逢衣博帶的文??的樣子, 還指那亡國遺民忍辱負重的柔道人生觀.)?4)라고 했다.
殷 나라가 멸망한 以後에 殷 나라 遺民의 선비들이 건드려도 개의치 않는 無抵抗主義에 익숙해져서 軟弱한 사람이라는 의미로서의 ‘儒’의 別名을 얻었다는 胡適의 說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답습되어 ‘儒’의 신분을 격하시켜 설명하는 데 흔히 이용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자의 견해로는 ‘儒’가 후에 軟弱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殷 나라가 멸망한 以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