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금융 탈규제
(financial deregulation)의 논쟁에 대한 서베이1)
安 賢 孝
목차
1. 서론
2. 역사적 배경
3. 기업인수 및 합병에 관한 쟁점
4. 주식시장의 효율성에 관한 쟁점
5. 탈규제 정책에 관한 쟁점
6. 결론
1. 서론
금융 탈규제라는 현상은 1970년대 자본주의 위기 이후 나타난 현대 자본주의의 일련의 새로운 특징 중에서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움으로서는 불확실성(uncertainty), 유동성(mobility), 유연성(flexibility)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들과 새로운 특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의 위기, 더 위로 올라간다면 1940년대에 시작했던 ‘케인즈주의적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1940년대의 개입주의적 자본주의는 불확실성에 대비되는 (거시적) 안정성(stability), 세계화에 대비되는 국민국가의 자율성(autonomy), 3차산업 또는 금융, 서비스 산업에 대비되는 2차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업 및 대량생산(mass production) 체제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 유동성은 생산영역에서도 관찰할 수 있지만, ‘금융적 순환’의 공간에서 더욱 확실히 발견할 수 있다.2)
이 글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미국에서의 금융탈규제와 관련된 논쟁을 검토하여 금융공간에서 나타난 불확실성과 유동성의 의미를 우회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쟁의 서베이를 통해서 우리는 금융의 탈규제가 다른 형태의 규제의 도입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될 때 그것은 또 다른 무질서를 양산할 뿐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가 있으며 결국 금융탈규제의 쟁점은 탈규제냐 규제냐가 아니라 어떤 형식의 규제인가라는 점이라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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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의 도입으로 각국의 금융 시장은 분리되어 있었으나 이후 금융제도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면서 60년대부터 서서히 국제적 금융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수요의 징표가 유러달러 시장인데 영국은 영국대로 스터링 위기의 타개책으로서, 미국은 미국대로 국내의 자본통제를 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서 유러달러 시장을 활용했다. 따라서 유러달러 시장은 성립의 초기부터 매우 자유주의적 분위기에서 발전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60년대부터 나타난 국제수지적자(와 이에서 비롯한 금태환의 러시)를 해소하기 위해 외국의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미 지폐 달러를 보유하도록 강제하였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였을 때, 유러달러 시장은 미국 적자의 중요한 자금원이 됨으로써 미국 금의 유출을 막아주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그 자체가 미국 내부의 금융규제를 완화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1974년 미국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카터행정부 시절인 1978-79년에 들어서 수지 적자로 인해 달러 신뢰도가 매우 급속히 하락하자 카터행정부는 또 다시 타국 중앙은행에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경상수지 적자를 외국으로부터의 자금도입에 의존하여 해결하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타국 중앙은행의 협조도 없는 상태에서의 달러 신뢰도 하락은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드디어 1978년 말 탈규제주의자인 볼커(Paul Volcker)를 연방준비기금의 의장으로 임명하고 볼커는 매우 강력한 긴축 통화정책을 천명한다. 이 볼커의 안정화정책은 곧 효과를 나타내어 유러달러 시장으로부터 달러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1979년에 이르자 유입된 달러는 미국 통화(M3)의 10%에 이르게 되었다.6)
이어 80년대에 들어 레이건 행정부는 군비지출의 증가와 함께 급격한 감세 안을 실행함으로써 경상적자 외에도 큰 폭의 재정적자를 기록하게 되었다. 1981년에 90억$였던 재정적자가 레이건 행정부 취임 이후인 1983년에는 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