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와 사르트르의 사상
1. 푸코와 사르트르
1970년대 중반 병들어 누울 때까지 사르트르는 20세기의 볼테르Voltaire였다. 다양한 능력을 지닌 지식으로서의 그는 정의의 이름 아래 언제나 억압당하는 자들의 편에 섰으며 어떤 정당이나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기존의 질서에 대항해 싸웠다. 예전에 볼테르가 그러했듯이 사르트르는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알려졌고, 그 때문에 탄압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푸코가 사르트르와 같은 유명세를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르트르는 푸코에게 있어 적이자 스승이었으며 동지였고 어떤 의미에 있어서 푸코는 그의 후계자였다. 1960년대 푸코는 모든 형태의 휴머니즘과 의식철학에 대해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했으며, 이런 적대감은 서구마르크스주의 일반에 대해서 특히 사르트르에 대해서 퍼부어졌다. 푸코가 ‘인간은 죽었다. L`homme est mort’고 외쳤을 때 그는 의심할 바 없이 그가 도전했던 휴머니스트들 속에 사르트르를 포함시켰다. 1960년대에 이미 두사람은 논쟁을 주고 받았으며 사르트르는 ??말과 사물??이 성취한 바를 인정했지만 푸코의 역사문제, 즉 한 에피스테메epist?me가 어떻게 다른 에피스테메를 밀어내는가의 문제를 회피했다고 비판했다. 5월 사태 직전에 푸코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띠를 이미 지적세계에서 낡은 것이 되어 버린 정신에 의해 고무된 지나간 시대의 ‘용감하고 인자한’ 사람들로 평가한 바 있다. 또 그는 헤겔에서 사르트르에 이르는 전체화totalization의 작업을 이제는 낡은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1968년 이후 푸코는 사르트르와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많이 거두어 들였다. 그는 이들이 가지는 입장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자신과 사르트르와의 공통점을 찾아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푸코는 이제 파리의 지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세계에 있어서의 사르트르의 위치를 계승하는 것으로 보…(생략)
2. 지식의 기반
3. 총체화의 문제
4. 이론의 대상에 대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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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그러나 여러 공통점이 있다 해도 총체화의 문제는 두 사람간에 차이가 났다. 푸코는 이론가의 인식론적 위치의 범위를 제한하는데 몰두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위치를 체계화하고 그가 쓰는 개념을 명료히(!) 하는 것 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사르트르는 자신이 세운 비판이론을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 위에 기초지었다. 지식의 모든 노력은 행위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개인의 필요로 회귀하게 된다. 총체화의 정교한 복잡성은 이론가가 스스로에 대해 선택하는 인식론적 순간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비판이론은 단지 이론가의 개인적인 목소리일 뿐이다.
사르트르에게는 푸코도 간과할 수 없는 지적인 정직함이 있다. 이론가의 입장은 그가 개진시키는 지식에 대해 중요하다. 푸코의 지식의 타당성에 대한 겸손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이중성이 텍스트내에 도입되면 이 이중성을 통해 텍스트는 의도하지 않은 객관적 권위를 주장하게 된다. 결국 지식의 개인적 성격에 대한 사르트르의 주장이 보다 니체적이며, 비반성적인 겸손을 통해 텍스트로부터 물러나는 푸코보다 지식이 다른 수단을 통한 권력이 되어버리는 위험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의 태도에도 타당성이 있는데 사르트르의 경우 자기반성에의 요청은 결국 자기정당화로 귀착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의식을 정의해야 하는 단순한 필요로부터 시작해서 세계의 피억압자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는 기묘한 체계로 끝난다. 결국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대한 정교화를 통해 이성의 범위를 축소하고자 한 사르트르의 노력은 지식인들의 힘을 놀랍도록 팽창시키는데 귀속하고 만다.
4. 이론의 대상에 대한 문제
이론의 대상object of theory에 대한 문제에 있어 푸코와 사르트르는 첨예하게 대립한다. 사르트르에게 사회역사적 場은 인간과 사물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며 그는 생산양식에 대해 주목할 때도 인간주체들의 세계와 사물들의 매개에 의한 타자성의 도입(소외)에 주된 관심을 집중했다. 사르트르의 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