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의 경제
1 들어가며
60년대말 부실기업 정리와 국가기업의 민영화를 거치면서 위기 과정에서의 기업 합병?인수를 통해 보다 급속하게 자본의 집중을 이룬 독점 자본은, 새로운 차원의 축적을 재개하기 위해서 종속적 축적구조를 보다 고도화할 필요를 느끼고 수출 지향적인 중화학 공업화를 중심으로 종속적 축적 구조의 재편을 추진한다. 동시에 이러한 재편과정은 이전보다 훨씬 체계적인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7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위기에 대해 국가와 독점자본은 전에 비해 보다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결합할 필요를 느꼈고, 이후의 자본축적 과정은 양자가 하나의 몸체로 완전히 융합됨으로써 메커니즘 확립을 가져왔다. 또한 *8?3조치를 통해서 자본의 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국가는 산업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가치파괴를 촉진하고 파괴된 가치에 대해 충분히 보상을 해줌으로써, 독점자본의 위기를 해소하고 독점자본의 축적을 가속화하기 위한 축적 구조를 재정비하게 된다.
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 과정은 산업자본의 독점적 기초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것은 노동자 계급과 자본(국가권력)간의 모순을 첨예하게 하는 것이었고, 노동자계급의 집중 등을 초래함으로써 그들의 진정한 의미에서 계급으로 성숙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농촌이 보다 직접적으로 자본주의 부문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됨에 따라서 농민과 자본(국가권력)간의 갈등관계도 표면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우선 70년대에는, 수직적 국제분업체계의 형성에 따라 해외로부터의 자본 및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서 대량생산체계가 확립되고 합리화가 촉진됨으로써, 그리고 노동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어지고 또 생산향상운동(예컨대 공장 새마을운동이나 품질관리운동 등)을 통해 노동강도가 강화됨으로써 직접적 생산과정에서의 착취가 강화되었다.
생산과정에서의 직접적 착취와 함께 국가를 매개로 …(생략)
2. 중화학 공업 육성
3. 석유 파동과 물가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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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재생산 과정의 체계적인 규제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먼저 중화학공업화에 소요되는 막대한 투자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는 재정을 통한 지원과 금융기관에 대한 지배를 이용한 정책 금융을 최대한도로 활용하였다. 예산에 책정된 경제개발비 가운데 중화학공업 지원비의 비중은 1970~80년에 연평균 14.6%를 차지하고 있었고, 정책금융을 보더라도 국민 투자 기금 전체의 약 68%가 중화학 공업부문에 할당되었으며, 여기에 전자공업을 포함하면 93%가 중화학공업에 직?간접적으로 투입되었다. 또 1973~1980년 사이 제조업에 대한 산업은행 대출의 약 80%가 중화학공업 부문에 투자되었다. 이러한 자본 조달 및 재분배와 관련한 지원 이외에도 각종 세제상의 지원을 통해서도 독점의 비용을 격감해 주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조세감면규제법과 관세법 등을 통해, 3년간 100%와 2년간 50%의 직접 감면, 8% 내지 10%의 투자액 감면, 100%특별상각 중에서 혜택을 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관세도 감면되었다. 그 밖에도 국가는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을 통해 독점자본의 중화학 공업 투자를 지원하였다.
3. 석유 파동과 물가 상승
1970년대의 세계경제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었다. 한국경제는 제 1차 석유 파동을 비교적 쉽게 넘길 수 있었다. 당시 석유 수출로 엄청난 외화를 획득하고 있던 중동 국가들은 방대한 건설 계획을 추진했는데, 마침 적절한 기술과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던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미국, 일본, 독일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의 경제 성장률이 현저히 저하되었던 1973~1979년의 기간에도 한국은 연평균 9% 이상의 고도 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의 성장은 물가상승을 대가로 주고 얻은 것이었다. 제 1차 석유 파동이후 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20%를 넘어섰으며, 물가상승에 따라 원화의 실질 환율도 23% 정도 상승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 2차 석유파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