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상세분석 레포트
[1]오스만 제국의 역사 개관
1-1.오스만 제국의 주요 술탄들
1-2.오스만 제국의 쇠퇴
[2]오스만 제국의 정치
2-1. 오스만 제국의 통치 방법
[3]오스만 제국의 경제
3-1.운송
3-2.상업
3-3.농업
3-4.제조업
[4]오스만 제국의 사회
4-1.인구
4-2.의복
4-3.군사
4-4.교육
4-5.경축일
4-6.공공장소
4-7. 사회집단 간의 협력과 갈등
[5]오스만 제국의 문화
5-1.음악
5-2.건축
5-3.언론출판
5-4.문학
5-5.시각 예술
5-6.음식
5-7.종교
[1]오스만 제국의 역사 개관
1-1.오스만 제국의 주요 술탄들
(1)오스만 제국 탄생
아나톨리아 셀주크제국의 말기에는 10개의 봉건제후국이 있었는데, 그 중 오스만 부족국이 비잔틴 제국과의 국경 부근인 사카랴 호수 부근의 쇠위트에 있었다. 아나톨리아 셀주크 제국의 세력이 약해지고 몽골의 지배가 시작될 무렵, 몽골군에 점령되지 아니한 아나톨리아 각지에 튀르크 부족의 독립된 토후국들이 생겨났다. 오스만 토후국도 그 중의 하나였다. 셀주크 제국의 말기에 이르러 이들 토후국은 셀주크 술탄의 지배를 벗어나 계속 독립하였는데, 오스만 부족국도 1299년 독립하였다.
그 후 약 250년 간 소아시아반도 서북쪽 한 모퉁이에 있는 이 작은 토후국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3대륙에 걸쳐 영토를 확장했고 쉴레이만 대제 시대인 최전성기때는 20 여개 민족 약 5천 만명의 인구를 가진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생략)
(2)제국 건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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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대에 대패함으로써 아나톨리아 셀주크 국가가 그 힘을 잃게 되자,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강력한 부족장을 중심으로 한 부족국가들이 이 지역에서 난무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국의 제 3대 술탄인 무라드의 후계자 바예지드 1세(재위 1389~1402)때인 1396년 오스만국은 헝가리가 조직한 십자군 원정을 맞아 다뉴브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중세 마지막을 장식한 십자군의 참패는 유럽을 공포에 떨게하는 한편, 오스만국의 발칸반도 지배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 바예지드 1세는 십자군 원정을 맞아 그 위기를 타개하여 십자군은 물리쳤으나, 아나톨리아 동쪽으로부터 진입해오는 티무르군대를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오스만국의 세력 확장은 잠시 차단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노리고 있던 오스만국 군대는 뜻하지 않게 몽골제국의 침입을 맞게 되었다. 1402년 7월 28일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는 술탄 바예지드 군대를 격퇴시키고 술탄을 사로 잡았다. 앙카라 전투는 앙카라 근처 추북(Cubuk) 평원에서 티무르와 바예지드 간에 일어난 전투로서 오스만 제국 역사중 가장 큰 전투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오스만국의 군대가 티무르에게 대패함으로써, 아나톨리아 동부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동시, 콘스탄티노플의 장악도 목전에 둔 오스만제국의 영토확장은 반세기 정도 지연되게 되었다.
술탄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 군대와 가진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사망한 후 오스만국은 와해되고 혼란의 시기를 맞았으나 바예지드 1세의 네명의 왕자 중 메흐메드 1세가(1413~1421)가 다른 세형제를 살해하고 왕위를 승계함으로써 국가재건에 성공하였다. 정복자 티무르는 앙카라전투 이후 8개월간 아나톨리아에 머물고 사마르칸트로 귀환할 때 바예지드의 아들 중 무스타파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이후 왕위 승계를 위한 형제간 싸움이 11년간(1402~1413) 계속되었다. 메흐메드 1세(1413~1421)와 무라드 2세(1421~1451)의 통치기간은 오스만국의 세력 강화기간으로 이들은 수많은 전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