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1. 고리타분한 한시?
<한시(漢詩)>하고 하면 요즘의 젊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조선시대 두루마기 입고 긴 수염을 날리며 무서운 얼굴을 한 융통성 없는 할아버지의 모습? 누런 종이에 먼지만 잔뜩 묻은 채 쌓여있는 전혀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를 않는 옛날 책들? 복잡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중국 글자들? 그보다 많은 대답은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는 말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이 시대 - 텔레비전과 컴퓨터 게임과 만화, 영화, 온갖 스포츠와 성산업의 상업주의와 연예계의 가십들의 시대 - 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공통될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한 신경질적 부정적 견해들에 맞물려 조선 선비들의 문화 문학도 모두 타기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어버린 것도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일찍이 춘원 이광수가 조선문학을 다 갖다 버릴 것으로 매도하고 조선인의 성격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 속에는 분명히 선비들의 고리타분한 한시문학도 타도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 전부터도 민중들에게 양반들의 횡포를 비난하는 이야기 중에 한시가 들어있는 것도 있다.
어떤 양반이 겨울이 되어 머슴이 할 일 없어 노는 꼴을 보지 못해서 사냥을 나갔다. 한참 애를 쓴 끝에 꿩을 한 마리 잡았다. 이 꿩을 점심으로 먹어야겠는데, 양반은 머슴녀석과 나누어 먹을 것이 억울했다. 그래도 명분 없이 안줄 수는 없어서 꾀를 냈다. “얘야, 꿩은 작고 우린 둘 다 배가 몹시 고프니 한사람이 모두 먹는 것이 낫겠다. 시를 먼저 짓는 사람이 꿩을 먹도록 하자꾸나.” “네? 시가 뭔가요?” “쉽다 쉬워, 끝에 같은 글자가 세 번 들어가는 말을 만들면 되는 것이야. 그 같은 글자는 ‘구’자로 하자.” 양반은 구 자가 운자가 되는 시를 공들여 생각했다. 거의 네 구가 다 만들어질 참인데, 머슴녀석이 갑자기 냉큼 꿩을 집어들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시구/ 뭐구/ 먹구/ 보자/.” “아 이 녀석아, 그게 시냐?” “왜 아닙…(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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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보는 자신의 시의 마귀에 씌운 것 같아 괴롭지만 시를 짓지 않을 수는 없다고 했다.
이러한 한시 문학은 우리 앞 천년이 넘는 세월의 무게로 쌓여 있다. 근대 문학이 형성된 것이 백년에 불과하지만 한시문학은 신라이래 천오백년동안이나 지어지고 감상되어 왔다. 그것은 우리가 부정할래도 할 수 없는 우리 정신문화의 뿌리로 자리잡아 있다. 마치 불교가 외래종교이지만 우리 정신 문화의 큰 축을 이루는 것과 같다. 불교를 배척하는 사람도 우리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알지 않을 수 없고, 사실은 자신도 모르게 불교적 사유방식, 행동양식을 갖고 있다.
근대시를 쓰던 시인들도 한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오일도, 조지훈, 김종길 한용운 등이 있다. 이육사는 한시를 많이 배웠고 그의 시에는 한시의 영향이 많이 들어있다.
근대화가 갑자기 밀어닥쳤고, 근대화는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현재의 우리 문학은 서양 문학과 별 변별성이 없게 되었지만, 그리고 점점 더 문명의 차원에서 서구화가 진전될 것이지만, 문화의 차원에서 우리의 것을 가지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햄버거에 청바지에 같은 음악을 듣지만, 전세계가 똑같아지는 것이 바람직할까? 세계 어딜 가도 똑같은 음식, 같은 건물양식, 같은 옷, 같은 영화, 똑같은 시 소설 …. 서울 동경 캘커타 시드니 뮌헨 뉴욕 카이로 브라질리아, 기껏 여행을 갔더니 서울과 대동소이한 느낌만 있다면 편리하고 좋을까?
생활의 편리한 것은 공유하겠지만, 민족마다 다른 영화, 다른 음식, 다른 건물양식, 다른 춤, 다른 음악, 다른 시 소설이 있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만의 문학은 서양 일변도로 수입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 문학은 이제 우리 선조들이 천년 이상 다듬어왔던 문학적 전통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학이 서양문학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음악도 인도음악, 아프리카 음악, 한국음악, 중국음악이 다 다르지만, 현대에는 거의 유럽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