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 (柳馨遠, 磻溪, 1622~73)
생 애
ㅇ 본관 문화(文化). 호 반계(磻溪). 서울 출생.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23세 때 할머니 상(喪)을 당하고, 27세에 어머니 상, 30세 때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전후 9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지평(砥平)?여주(驪州)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러한 환경변화는 사상과 생활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ㅇ 1653년(효종 4)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하였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수차 전국을 유람하였다. 1665?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ㅇ 호조참의(戶曹參議)?찬선(贊善)에 추증되었고,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
ㅇ 20여 종의 저서와 문집을 남겼으나 남아 있지 않고, 《반계수록》과 《군현제(郡縣制)》 1권이 전할 뿐이다. 31세에 『磻溪隨錄 』을 쓰기 시작하여 49세에 완성하였다. 田制에서 시작하여 兵制로 완결되는 하나의 방대한 국가의 典範이라고 하겠다.
ㅇ 부국유민 기본목표는 그가 꿈에도 잊지 못하는 북벌을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반계는 15살 때에 병자호란을 만나 원주로 피난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함께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 원수??인 오랑캐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집에 준마를 길러 하루에 3백리를 달리면서 양궁?조총으로 가동 및 里人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균전제
ㅇ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兼倂)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田制)를 개편, 세제?녹봉제(祿俸制)의 확립, 과거제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균등의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였다.
ㅇ 그는 모든 개혁은 토지제도의 개혁에서 출발한다고 파악하였다. 職田制가 무너지고 궁방전,…(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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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는 제도이다. 세출은 세입을 기준으로 책정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상업 무역도 관심
ㅇ 유형원은 상점(鋪子)의 설치를 권장할 방안을 모색하며, 상업에 처음 종사하는 자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는 것까지 고려하고, 해외 통상의 유용성, 화폐사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세금의 수취와 관리 녹봉을 지급하데는 사용을 강제할 정도이다.
ㅇ 당시 제조하는 물품이 정밀하지 못한 원인을 관부의 지나친 수탈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을 임금노동자나 관의 부역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제안한다.
ㅇ 중세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의 이중성과 양면성이 그의 학문의 한 특성이라면, 그것은 그만의 성격이 아니라 그 시대가 갖는 과도기적 성격, 시대적 한계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