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
1. 머리말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30대에 경주 용장사 부근에서 은둔하던 1465년부터 1470년 사이에 지었다고 추정되는 한문단편소설이다. 하지만 그 행방을 오래도록 알 수 없었고, 단지 조선시대에 이황이 읽었다고 하는 기록과 송시열이 금오신화를 구하고자 했으나 못 구했다는 기록 등만 남아있었다. 이후 금오신화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두 차례에 걸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2차로 간행되었을 때의 책은 두 권이었으며, 이 사실이 현전하는 5편 외에 다른 작품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이다. 지금 남아있는 5편도 국내에는 필사본밖에 없고 일본에서 간행된 동경 판각본이 1927년 <계명(啓明)> 제 19호에 최남선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2. 몸말
2.1. 각 작품의 내용
2.1.1. 만복사저포기
죽은 여자와의 사랑을 그린 명혼소설(冥婚小說)이다. 전라도 남원에 양생(梁生)이라는 노총각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라는 절에서 방 1칸을 얻어 외롭게 살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절에 와서 소원을 비는 날 그는 모두가 돌아간 뒤 법당에 들어갔다. 저포를 던져 자신이 지면 부처님을 위해 법연(法筵)을 열고, 부처님이 지면 자신에게 좋은 배필을 달라고 소원을 빈 다음 공정하게 저포놀이를 했는데 양생이 이기게 되었다. 양생이 탁자 밑에 숨어 기다리고 있자 15, 16세 정도 되는 아름다운 처녀가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며 배필을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축원문을 읽은 다음 울기 시작했다. 이를 들은 양생은 탁자 밑에서 나가 처녀와 가연을 맺은 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얼마 뒤 양생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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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 죽기를 기다리는데, 신선이 된 선조가 나타나 불사약을 주어 그 약을 먹고 수정궁의 상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홍생이 부벽루에서 그 선녀와 하룻밤을 지내며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부르다가 날이 새자 그 선녀는 승천하고, 홍생은 집에 돌아와 그 선녀를 생각하며 사모하던 끝에 병에 걸렸는데, 그 선녀의 시녀가 나타나, "우리 아가씨가 상제께 아뢰어 견우성 막하의 종사를 삼았으니 올라오라."고 일러 주는 꿈을 꾸고 난 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분향하고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빈장(嬪葬)한 지 몇 달이 지나도 안색(顔色)이 변하지 않았다.
2.1.4 남염부주지
경주에 사는 박생(朴生)은 유학(儒學)으로 대성하려는 포부를 지니고 공부하나 과거에 실패하여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뜻이 높고 강직하고 인품이 훌륭하여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귀신 · 무당 · 불교 등의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고 유교경전을 읽고, 세상의 이치는 하나뿐이라는 내용의 철학논문인 <일리론(一理論)>을 쓰면서 자신의 뜻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어느날 꿈에 박생은 저승사자에게 인도되어 염부주(炎浮洲)라는 별세계에 이르러 염왕(閻王)과 사상적인 담론을 벌였다. 유교 · 불교 · 미신 · 우주 · 정치 등 다방면에 걸친 문답을 통하여 염왕과 의견일치하고 자신의 지식이 타당한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염왕은 박생의 지식을 칭찬하고 그 능력을 인정하여 왕위를 물려주겠다며 선위문(禪位文)을 내려주고 세상에 잠시 다녀오라고 하였다. 꿈을 깬 박생은 가사를 정리하고 지내다가 얼마 뒤 병이 들었다. 그는 의원과 무당을 불러 병을 고치지 않고 조용히 죽었다.
2.1.5. 용궁부연록
시문에 능한 한생(韓生)이 표연(瓢淵)에 살고 있는 용왕이 보낸 사자를 따라 용궁으로 들어간다. 청의 동자(靑衣童子)의 안내를 받아 함인지문(含仁之問)을 지나 수정궁을 들어가니, 조강신(祖江神), 낙하신(洛河神), 벽란신(碧瀾神)의 세 신왕(神王)이 초대되어 와 있었다. 용왕은 한생을 초대한 이유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