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11월28일 공연을 관람 할 수가 없었다.28일 나또한 공연이 있었기에 어쩔수없이 국립 국악원에서 하고 있는 토요 상설 국악공연을 보게 되었다. 토요 상설 국악공연은 매주 토요일 마다 다른 공연을 하는데 황종형, 대려형, 태주형, 협종형, 고선형, 중려형, 유빈형, 임종형, 이칙형, 남려형, 무역형, 응종형이 있다. 나는 무역형을 감상 하게 되었는데 무역형 공연에서는 수제천, 적벽가(판소리) 처용무, 정선아리랑, 애원성, 한오백년, 강원도아리랑 (경기민요) 피리산조우조삼수(남창가곡) 연변목가(백대웅曲)(창작관 현악)다랑쉬(김대성曲)(창작관현악) 선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무대가 아늑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인지 편안한 마음으로 국악을 감상 할 수 있었다. 공연이 시작 되었고 나는 수업시간에 배웠 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경청하였다. 각각의 무대들은 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엄숙한 분위 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아름다운 몸짓으로 나를 빠져들게 만들기도 했다. 판소리를 저번 학기 교양수업에 듣기도하고 개인적으로 부산에 ‘동녘’이라는 극단에서 1년동안 객원으로 뛰 면서 마당극을 해본 경험도 있긴 하지만 판소리 적벽가를 직접들은것은 처음 이다.적벽가는 일명 <화용도>(華容道)라고도 한다.중국의 위, 한, 오 삼국 시대에 유비가 손권과 동맹하여 조조의 80만 대군을 주유 등의 소수의 군사로 화공(火攻)에 의해 무찌르는 적벽대전을 중심 으로 판소리로 짠 것이다. 적벽가의 줄거리는 삼고초려, 장판교 싸움, 군사 설움 타령, 적벽강 싸움, 화용도 장면 등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원래 판소리는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으며 판소리 중에서도 적벽가는 남성다운 씩씩함과 장쾌 함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소리였다. 따라서, 명창 박동진의 말을 빌면, 예전에는 창자에게 맨 먼저 적벽가를 할 수 있는가 묻고, 적벽가가 안 된다고 하면 수궁가, 춘향가 등으로 격을 낮추어 소리를 청했다고 한다. 적벽가는 삼강오륜 가운데 붕우유신(朋友有信)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김일구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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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이 끊어졌던 것을 1928년에 구황궁아악부(舊皇宮雅樂部) 김영제(金?濟), 함화진(咸和鎭), 이수경(李壽卿) 이 ≪악학궤범≫과 장악원에서 쓰던 정재홀기(呈才笏記)를 참작하여 새로 안무한 것이다. 처용탈은 모시 또는 옻칠한 삼베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은 적면유광(赤面油光)으로 후덕한 모습으로 한다. 사모는 대〔竹〕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바르며,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 珠)를 걸고 복숭아 열매와 가지를 단다. 춤은 다섯 무원(舞員)이 각각 청(동), 홍(남), 황(중앙), 흑(북), 백(서)의 단의(緞衣)를 오방에 맞추어 입고 서서 처용가면과 사모를 쓰고 홍록흉배(紅綠胸背), 초록천의(草綠天衣), 남오군 (藍?裙), 홍방슬(紅方膝), 황초상(黃?裳), 금동혁대(金銅革帶)를 띠고 백한삼(白汗衫)을 끼고 백피혜(白皮鞋)를 신고 춤을 춘다. 수제천(壽齊天, 빗가락 정읍)에 맞추어 두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홍·황·흑·백의 차례로 들어와 일렬로 북향하여 서서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천하태평나후덕(天下太平羅候德)…"하고 처용가를 가곡(歌曲) 언락(言樂)가락에 맞추어 부르고 나서 향당(鄕唐) 교주(交奏)하면 처용 5인이 모두 허리를 굽힌 다음 5방으로 마주 서서 춤추다가 소매를 들어 안으로 끼는 홍정(紅程) 도돔춤을 추고나서 발을 올려 걸으며 무릎을 굽히는 발바딧춤을 추며 북향하여 섰다가 가운데 황(黃)과 사방은 반대로 향하여 춤을 춘다. 오방무원은 각기 무진무퇴(舞進舞退)하여 다른 방향으로 들어서는 발바딧작대무〔作隊舞〕를 추고 황은 북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무릎디피춤을 추고 청·홍·흑·백은 중앙을 향하여 춤을 추되 처음에 흑과 황이 대무(對舞)하고 청·홍·백이 차례로 대무한 다음 중앙을 등지고 추다가 제자리를 향하여 춘다. 회선(回旋)·우선(右旋)으로 흑(黑)이 먼저 나오고 황은 백과 홍 사이 에 들어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흑은 뒤로 물러서고 홍은 앞으로 나가 처용 5인이 가지런히 서면 일제히 북향하고 선 다음 노래를 한다.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